한때 세상을 다 가졌던 알렉산더 대왕이 거리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 “그대의 소원을 말하면 모두 들어 주겠다”고 말하자 디오게네스는 “지금 가리고 있는 햇빛 앞에서나 좀 비켜주라”고 일갈해 절대 권력의 권위를 한순간에 무색하게 했다.
열반하신 무소유의 선각자 법정스님도 세속의 욕망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저 푸른창공과 들꽃, 구분 없이 스며드는 햇살, 골짜기를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는 마음 설레어 했다. 이렇듯 가을에는 세상만물이 황금빛 천연보석으로 변한다.
디오게네스의 황당한 답변에 알렉산더 대왕을 추종하는 무리들과 간신배들은 코웃음을 쳤을지 모르지만 곡식과 과일이 익어가려면 가을햇살이 꼭 필요하듯 세속적 권력과 물질보다는 존재의 의미와 삶의 의미를 궁구했던 디오게네스에게는 알렉산더 대왕이 가리고 섰던 햇살이 더 중요했을 성 싶다.
그런 가을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매년 돌아오는 가을이건만 지금 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절대 권력의 상징이었던 알렉산더대왕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디오게네스의 무심한 표정, 그 장면이 오버랩 되는 하수상한 세월 때문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에서는 서로 주도권을 잡기위해 혈안이다.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쪼개져 사분오열이 되고 있다. 자유한국당에서는 친홍세력과 친박세력간 집안싸움이 점입가경이고, 새로운 보수당으로 일어선 바른정당은 이혜훈 전 대표의 사퇴로 쑥대밭이다.
국민의당의 검찰조사를 둘러싼 내홍과 새로 안철수 대표를 선출하기까지 있었던 세력 간 흔들기와 이합집산은 한국정치의 대안세력으로 기대에 부풀었던 수많은 국민들을 실망에 빠뜨렸다.
모두가 화려한 권력에 드리워진 응달의 모습들이다. 이들에게 디오게네스가 찾는 가을햇살 따위는 관심 밖이다. 저 알렉산더 대왕이 가진 화려한 금장과 수많은 신하, 막강한 절대 권력의 위엄, 바로 그 특권에만 혈안이 돼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가을은 지난여름과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이기고 권력을 쥐면 그것이 따뜻한 봄이고, 넉넉한 가을인 것이다. 모든 것을 진영의 논리로, 당파의 논리로 보고 듣는 정치권에서 순리를 말하고 계절의 풍요를 논하는 것은 객쩍은 짓인가.
누가 뭐래도, 그래도 어김없이 가을은 왔다. 서울에는 아직 가을이 오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시골에는 이미 가을이 도착했다. 스마트문명은 도시가 빠르지만 자연문명은 시골이 더 빠르다. 시골의 가을은 장독대에서 출발한다.
지상의 햇살 수신기 장독대가 햇살을 받아 감나무에 반사하면 여름내 시퍼랬던 땡감은 어느새 불그스레 홍시로 변해버린다. 그 곁에 널린 고추도 덩달아 빨갛게 물들어 익어가면 여름짝짓기를 놓치고 홀로 남은 매미는 분통이 터져 괜시리 목청 터져라 울어대는 게 시골의 가을이다.
햇살이 가을을 영글게 한다면 달빛은 마음을 충만하게 한다. 여름이 ‘선텐’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달의 정취에 취하는 ‘문텐’의 계절이다. 낮 가을이 황금빛이라면 밤 가을은 흑백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 티끌 없이 공활한 밤하늘, 백열등처럼 둥근 보름달, 그 여백사이로 소슬바람에 떠다니는 흰 구름, 담 밑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
택배가 된다면 여의도에도 시골가을을 배달해주고 싶다. 똑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가지만 계절을 잃어버린 서울의 가을, 그 속에서 자기만의 계절을 만들어가는 스마트문명. 속도에 눌려 서정을 잃어버린 한국정치가 이 가을 “내가 대왕이 아니었더라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한 알렉산더 대왕의 말을 한번쯤 되새겨 보면 어떨까.
〈정승화 기자=경북뉴스통신 취재국장/경영학박사. hongikin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