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경북 포항을 뒤흔든 지진은 단지 한 도시의 상처로만 남지 않았다. 국책사업인 지열발전이 불러온 '촉발지진'이라는 점에서, 이 재난은 명백한 인재(人災)였고, 국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역사적 시험대였다.
정부조사단은 지진의 원인을 지열발전으로 명시했고, 감사원은 20건의 위법·부당 행위를 지적했다. 심지어 국무총리 산하 포항지진진상조사위원회는 사업 관계자들을 업무상 과실치상 혐의로 기소했다. 전문가들도, 피해자들도, 언론도 그 책임을 물었다.
그럼에도 지난달 대구고법은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지진 피해 시민 111명이 국가와 포스코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항소심에서 재판부는 '과실 입증 부족'을 이유로 기각했다. 원고 패소. 피해자들에게는 차가운 결론이었다.
그러자 이제서야 포항시, 시의회, 지역 국회의원들까지 줄줄이 대법원 앞에 모였다.호소문을 제출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촉구했다. 그 진정성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질문은 피할 수 없다.
정말 지금 이 항소심 판결까지 가는 동안 지역 정치권과 지도자들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는가?
기억해보자. 지난 수년 간, 포항지진과 관련한 피해자 단체, 범시민대책본부는 줄기차게 목소리를 내 왔다. 생계 기반을 잃은 시민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학생들, 무너진 일상을 되찾지 못한 노인들.
하지만 그간 정치권과 시 당국이 보여준 대응은 소극적이고 분절적이었다.
중앙정부 책임만을 강조한 채, 지역 차원의 여론 수렴, 법률적 공방 준비, 피해자 지원 체계 구축은 충분치 않았다. 오히려 정치적 이슈에 따라 그때그때 반짝 대응에 그친 감이 적지 않다.
항소심까지 이르기까지, 수년간 이어진 재판. 그 과정에서 정말 실질적 피해 자료 축적은 충분했는가? 전문가 자문과 법리 검토는 일관되게 이어졌는가? 시민 전체의 집단적 법 감정을 전달할 조직적 장치가 있었는가?
지역 지도자들이 이제 와서 말하는 ‘정의로운 판결을 원한다’는 외침이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법 판단이 민감하고도 복잡한 영역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치권은 충분한 준비와 지역 공감대 없이 법원 앞에서만 항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지진 소송이 아니다. 국책사업과 시민 피해, 과실 입증과 국가 책임이라는 사법·정책·도덕적 쟁점이 뒤얽힌 '국가적 책임 판단'의 기준을 세우는 시금석이다.
그렇기에 대법원의 판단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무게만큼 지역의 정치·사회 지도자들도 자신들의 역할을 되짚어봐야 한다.
정의는 준비된 자의 것이다. 포항지진이 단지 대법원 판결만으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면, 포항시와 정치권은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묻고 답해야 한다. 우리는 시민과 함께, 충분히 싸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