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분기점과 나들목에 들어서면 차로 한가운데 분홍색·초록색 선이 운전자를 이끈다.
내비게이션 안내 음성에까지 등장할 만큼 익숙해진 이 '노면 색깔 유도선'은 정부 연구기관이 아니라 한 현장 직원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주인공인 한국도로공사 윤석덕 차장(포항고 38회)이 지난 18일 모교 동문 행사인 제27회 포고인 한마음축제에서 '올해의 포고인상'을 받으면서, 이 작은 선이 걸어온 길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 "전문가도 헷갈리는 길"에서 시작
윤차장이 노면 색깔 유도선을 구성하게 된 첫 시발점은 경기 안산분기점이었다고 한다. 영동선에서 서해안선으로 갈라지는 이 구간은 한 번 차로를 잘못 타면 곧장 목포 방향으로 빠지는 구조여서 사고가 잦았다.
한 해 20~25건의 사고가 났고, 표지판과 안전시설을 보강해도 별 효과가 없었다. 도로 기술자인 윤 차장 자신도 이곳에서 길을 잘못 든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중 2011년 3월 인근 분기점에서 화물차가 구조물을 들이받는 사망사고가 나자, 당시 도로공사 군포지사장은 "초등학생도 알아볼 수 있는 대책"을 주문했다고 한다.
의외로 기가막힌 해결책은 바로 자신의 집 거실에서 나왔다. 어린 두 자녀가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도로에도 색으로 길을 그리면 되겠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 법보다 먼저 간 행정, 11년 걸린 합법화
그러나 법이 그를 가로막았다. 당시 규정상 도로에 칠할 수 있는 색은 흰색·노란색 등 몇 가지로 한정돼 있었고, 분홍·초록은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변 전문가들도 사고 책임 문제와 위법 소지를 들어 대부분 만류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암초에도 불구하고 윤 차장은 지사장의 지지와 고속도로순찰대의 협조를 얻어 교통제한 협의를 거친 뒤 2011년 5월 안산분기점에 국내 첫 유도선을 칠했다.
이후 과정은 '현장이 제도를 끌고 간' 전형적인 사례다. 본사 심사에서는 위법을 이유로 한 차례 기각됐지만, 효과가 입소문을 타면서 다른 지사들이 자발적으로 따라 칠했고 2014년에는 전국 70여 곳으로 늘었다.
2017년 국토교통부가 설치·관리 매뉴얼을 만들며 사실상 공인했고, 2021년 4월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마침내 법적 근거를 갖췄다. 첫 선을 그은 지 11년 만이다.
▲ 숫자로 증명된 효과
도로공사가 76개 설치 지점을 분석한 결과 분기점 사고는 40%, 나들목 사고는 22%, 평균 27% 줄었다. 비용이 적게 들고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성비 높은 안전정책'으로 꼽힌다.
시행 과정에서 선 폭이 넓어 이륜차가 미끄럽다는 지적이 나오자 폭을 줄이고 미끄럼 방지 도료를 개발하는 등 보완도 이어졌다.
▲ 훈장에서 모교 표창까지
그의 이야기는 2020년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통해 대중에 알려졌고, 2024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올해 1월 1일에는 보신각 제야의 종 타종에 시민영웅으로 참여했다.
그는 이번 포고인상에 대해 모교 출신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아왔기에 더욱 뜻깊다는 소감을 밝혔다.
윤 차장은 2023~2025년 아프리카 모리셔스 파견 근무 중 현지 도입을 추진했고, 스페인과도 기술 지원 가능성이 논의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두 나라 모두 실제 설치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겨울철 블랙아이스 사고 예방 아이디어도 구상 중이다.
노면 색깔 유도선은 '규정에 없으니 안 된다'는 벽 앞에서 현장의 문제의식과 적극행정이 어떻게 제도를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